3. 핍진성

자기의 개성을 나타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집필할 의무가 작가에게 있듯이 독자는 넘쳐나는 작품 중에서 옥석을 가릴 식견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핍진성이라는 용어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아래의 글을 잘 읽어 주십시오.

리얼리티와 핍진성

리얼리티는 흔히 경험적 현실과의 일치로 정의된다. 그러나 어떤 리얼리즘적인 서사도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모사할 수는 없다. 언어 서사물의 경우, 아무리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고자 해도 비규정적이고 비분절적인 현실을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취사선택과 일반화와 주관적 관점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는 본질적으로 언어보다 미메시스적인 매체인 영상 서사물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큐멘타리 기록 영화라 해도 현실의 일부분을 잘라내어 프레임화하는 과정에서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변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는 많은 서사물들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서사물을 수용할 때 기꺼이 리얼리티의 환영illusion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사사물은 수용자들로 하여금 ‘지금 이 이야기는 현실을 재현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갖게 하며, 수용자들은 관례적으로 이 느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이렇게 보면 리얼리티란 서사적 관습에 의해 마련된 일종의 가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사물에서의 리얼리티는 현실과의 일치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과의 일치로 정의될 수 있다. 한 서사물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것을 보여준다면, 거기에는 리얼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리얼리티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식이나 여론과의 일치 여부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리얼리티에 대한 보편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과거에는 리얼리티가 있다고 느껴졌던 것이 나중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세적인 배경을 충실하게 재현한 어떤 서사물은 오늘날에는 그 시간적 거리감과 낯설음 때문에 비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반대로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인공지능 로봇에 관해 이야기하는 <바이센테니얼 맨>과 같은 이야기는 지금은 환상적이라고 느껴지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상당 부분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리얼리티라는 관념은 경험 세계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질 뿐 아니라 서사적 관습의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맨발의 청춘>과 같은 1960년대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독특한 억양과 과장된 몸짓 등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수용자들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가부키의 도깨비 같은 분장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러 듯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렇듯 리얼리티 자체가 가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면, 모든 서사물에 대해 리얼리티의 단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된다. 더욱이 <매트릭스>로 대표되는 시뮬라르크의 시대에,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오늘날 참으로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특히 허구 서사물에서 더욱 유효한 기준은 그 서사물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하는 점보다는 얼마나 그럴 듯한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고정된 리얼리티의 배타적 개념보다는 가변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을 대변하는 또 다른 개념이 바로 핍진성verisimilitude이다.

핍진성이 있다는 것은 서사물이 수용자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을 뜻한다.핍진성은 서사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띨 수 있다. 비극은 희극과는 다른 비극의 핍진성을 지니고, 로망스는 리얼리즘 소설과는 다른 로망스의 핍진성을 지닌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사물의 장르만큼이나 많은 서로 다른 핍진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장르의 핍진성이라는 관점은 서사물의 차이와 다양성과 공존성을 인정하는 열린 시각을 보여준다.

장르로서의 핍진성은 왜 어떤 서사물에서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리얼리티의 규범을 어긴 부자연스러운 장면으로 느껴지고 다른 종류의 서사물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해 준다. 리얼리즘 소설에서 우리는 불을 뿜는 용이 나오는 장면을 용납할 수 없지만, 판타지 소설에서는 그것이야말로 핍진성을 더하게 하는 멋진 장면인 것이다.

판타지 장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장르의 핍진성은 현실의 핍진성 또는 좁은 개념의 리얼리티와 배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추리소설에서 꼭 범인일 것처럼 보이는 용의자가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가장 범인이 아닐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질 때, 우리는 썩 그럴 듯하다고 느낀다. 이런 상황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지만, 익숙한 장르적 관행에 따라 수용자에게는 핍진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영화<유주얼 서스펙트>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경찰은 사건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인 버벌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카이저 소제라는 악명 높은 범죄자의 행각을 듣게 된다. 다리를 저는 소심하고 왜소한 인물 버벌은 카이저 소제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진술을 마친 뒤 풀려난다. 뒤늦게 그가 한 진술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거짓말 일색이었음을 알게 된 경찰은 당황하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이다.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의 절룩거리는 걸음걸이가 유유한 걸음으로 바뀌는 장면과 대기 중이던 부하들이 그를 승용차로 정중히 모셔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는 잔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범죄자가 알고 보니 그토록 못나고 볼품없는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 영화는 추리물의 핍진성을 기대하는 수용자의 요구를 만족시켜준다.

반면에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은 관례적인 핍진성을 깨뜨리면서까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극도로 사실적인 장면들과 인물의 대사들은 영화의 상식적인 관례에서 벗어난다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로 인해 관객은 때로는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되며, 비현실적이라는 느낌마저 받기도 한다. 이는 리얼리티와 핍진성이 마찰을 빚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우리가 사실적이거나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많은 것들이 실은 보편적인 관념과 익숙한 관습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예라 하겠다.

- 《문학의 새로운 이해 : 문학의 이동과 움직이는 좌표들》/ 박진, 김행숙 지음. 청동거울, 2004. 41-45 p. -

핍진(逼眞: 닥칠 핍, 참 진). 사전에는 “실물과 다름없을 정도로 몹시 비슷함”으로 나와 있습니다. 핍진성은 장르소설에 있어서 장르적 개연성이 얼마나 높은가를 재는 척도입니다.

판타지, SF, 추리/탐정, 로맨스, 무협, 패러디와 같은 장르소설은 일반 소설과 다른 배경 위에서 나름대로의 논리와 인과관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장르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와 독자는 공통의 약속을 공유합니다. 이 약속은 판타지처럼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기기도 하며(소설의 독창성이 중요한 것은 하나의 선례가 전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 기사의 이야기부터 오랜 세월을 거쳐 관습법처럼 굳어진 것(로맨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르 소설에는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몇 가지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