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르별 핍진성

핍진성이 무엇인지 알아봤으니 각 장르에는 어떤 핍진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무협 

현경과 탈마

무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정(正)과 사(邪)로 나눌 수 있다. 

어느 사이엔가 무공의 원류는 이렇게 둘로 나뉘더니 서로가 피를 피로 씻는 복수와 반목을 거듭해, 서로 왜 싸웠는지 그 시초조차 아리송해졌다. 정파는 사파를, 사파는 정파를 원수 보듯 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죽였다.

정파는 달마가 중원에 보급한 역근(易筋)과 세수(洗髓)의 두 진경(眞經)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공으로, 대부분이 불가(佛家)나 도가(道家)계통의 무술들이 주종을 이뤘다. 이른바 5대 세가의 경우도 원류를 따지면 9파 1방(九派一幇)의 속가 제자 중 뛰어난 자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문파에서 뛰어난 자들이 튀어나와 새로운 문파를 만들다 보니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 갈래조차 희미해질 정도였다.

고대의 무술은 들짐승이나 날짐승의 행동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소림 5권(小林五拳)은 호랑이, 표범, 뱀, 원숭이, 학의 움직임을 따라 이루어졌으며, 도가로부터 전수된 검법(劍法)도 동물들을 흉내 내어 시작되었다. 이러한 검법(劍法), 도법(刀法), 창법(槍法), 봉법(棒法), 권법(拳法), 장법(掌法)등의 무술을 통틀어 외가 무공(外家武功)이라 한다. 

반면에 내가 무공(內家武功)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이나 숨을 뱉고 쉬는 법을 일컫는 토납술(吐納術)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을 두고 토납을 반복하면 몸속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인 내공이 쌓이게 되는데, 그 내공을 권이나 장, 또는 검에 실어 내보내는 무술을 내가 무공이라 한다. 내공이 어느 정도 쌓이면 몸 안을 일주천시키며 더욱 그 힘을 증폭시켜 내공이 쌓이는 속도를 증가시킨다. 이 때 그 힘을 어떤 순서로 어떤 혈도로 보내느냐에 따라 다양한 운기 조식 기법들이 생겨났다.

정파는 내공을 익힐 때 그 공력이 천천히 쌓여 나간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진신 내공(眞身內功)을 얻거나 영약을 복용하지 않고서는 통상의 경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을 해도 40세가 넘어야 절정 고수에 이를 수 있고, 초절정의 고수가 되려면 60세가 넘어야 했다. 물론 타고난 신력(神力)으로 외공(外功)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내공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절정의 고수의 대열에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정파 내에서도 무공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마교에서처럼 파격적인 방법을 써서 속성으로 내공을 쌓지는 않는다. 

정파에는 명문(名門)이라 불리는 많은 방파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도가나 불가 계통이며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기에 명가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리고 명가의 제자들이 방문 외도(傍門外道 : 명가가 아닌 다른 다수의 군소방파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라 칭하며 깔보는 경향도 있지만 실질적인 정파의 저력은 소수의 명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군소 방파들에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군소 방파들은 내가 무공보다는 외가 무공을 익히고 가르친다. 명가들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우수한 내공 심법이 거의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외가 무공을 익히고 가르치는 것이다. 

명가(名家)에서는 후계자에게 진신 내공을 전수하거나 영약을 먹여 빠른 속도로 내공이 쌓이게 만든다. 그들에게는 각 문파의 정통 무공들이 교육되었고 그들은 적전 제자(適傳弟子)라고 불린다. 적전이 아닌 제자들은 내공이 상당히 취약하기 때문에 같은 초식(招式)을 써도 그 위력은 최소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상대에게 진신 내공을 전수할 때는 내공을 전수하는 쪽이 엄청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일가 피붙이라도 잘 전수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진신 내공을 전수받는 데도 한 가지 위험이 따른다. 같은 수련을 한 사람의 진신 내공이라면 성질이 같기에 전수받아도 상관없지만, 다른 종류의 수련을 하여 얻은 내공을 전수받으려면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진신 내공과 새로 얻는 진신 내공이 합쳐지지 않고 서로 충돌하여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치료나 공격 등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내공을 불어 넣기도 하는데, 그때의 내공은 진신 내공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내공을 받은 사람의 내부에서 이종(異種)의 내력은 소멸되며, 또 내공을 집어넣은 사람도 곧 내력을 회복할 수 있다.

내공을 특출한 경지까지 연마한 정파의 고수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삼경(三境)의 고수라 한다. 초절정 고수가 되면 내공의 정도와 무술실력이 거의 비례하기 때문에 삼경의 고수에 들어가면 거의 적수를 찾기 어렵다.

제1경(弟一境)은 조화경(造化境), 즉 화경(化境)이다. 이것은 천(天), 지(地), 인(人)의 삼화(三化)와 수(水), 목(木), 금(金), 화(火), 토(土)의 오기(五氣)를 고루 몸 안에 이루어 낸 삼화취정(三化聚頂) 오기조원(五氣造元)의 고수를 말한다. 이 수준에 이르면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통해 온몸이 무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반로 환동(反老換童)을 경험한다. 이때는 능히 소리로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한다. 화경에 오른 현존하는 고수는 일곱 명인데 그들을 3황 4제(三皇四帝)라고 불렀다. 거의 비슷한 무공 수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3황과 4제로 구분하는 이유는 서로간의 나이차 때문이기도 하며 4제보다는 3황의 무공이 좀 높았다. 또 정파의 고수들은 마교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네 명의 고수를 4천왕(四天王)이라고 했는데 그 칭호에서 정파 고수들의 은근한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다. 과거 현경의 고수가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 최강의 고수들인 이들은 모든 정도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제2경(弟二境)은 신(神)으로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현묘(玄妙)한 경지, 즉 현경(玄境)이라 한다. 현경의 경지에 이르면 더욱 뛰어난 육체로 면화하기 위해 또 다시 환골탈태하게 되고, 그 결과 몸에 만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 불침(萬毒不侵)이 되며 겉으로 전혀 정기가 드러나지 않는 반박 귀진(返縛歸眞)의 상태가 된다. 또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 경지를 이루면 치아(齒牙)까지 새로 나오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젊음을 되찾는다고 한다. 그들은 능히 몸에서 뿜어 나오는 예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데, 현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수천 년 무림사에 과거 천하 제일문(天下第一門)을 창설한 조사인 신검 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 단 한 명뿐이었다. 무림에서 인간이 달성해 낸 최고의 경지가 이 현경이었다. 

마지막 제3경(弟三境)은 불로불사(不老不死)하는 진정한 신의 경지, 즉 생사경(生死境)이다. 인간의 생과 사를 초월하고 우주 만물의 법칙을 한 눈에 꿰뚫어 내는 무예의 최고 경지로 추측되지만, 단 한 명도 그 근처까지 접근조차 하지 못했기에 생사경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다. 수천 년 무림사에 단 한 명도 탄생하지 않았던 지고무상(至高無常)의 경지가 바로 생사경이다. 혹자는 이 생사경은 있지도 않는 것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 냈다고 질책할 정도다.

어쨌든 정파의 무공이 이상과 같다면 사파의 무공은 정파의 무공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사파는 달마가 전래한 무공과는 달리 중원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무술이다. 그렇기에 토납술에서 정파와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 사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녹림(綠林 : 산적이나 해적 등 남을 등쳐먹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의 집단, 창부 등도 여기에 속함)이나 사파 무공을 익히는, 역사가 짧은 작은 군소 방파들은 내공의 기술이 정파보다는 떨어지므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 무공에 대한 파해식이나 기괴한 초식 등을 개발해 냈다. 따라서 사파에서는 기교에서 앞서가는 외가 무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약간의 기술과 그에 대한 숙련도만 있으면 되므로 빠른 시일 안에, 절정 고수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고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파 고수들이 미숙한 상태기 때문에 이들의 무공은 상당히 위협적이다. 사파에서 검뿐 아니라 실리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 다양한 무기를 개발하여 사용하며 각종 암기도 많이 애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사파들과는 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방파가 있으니 바로 마교(魔敎)다. 마교에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 따라 각종 체계적인 토납술이 개발되었고, 그들이 택한 것은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 기술 중에서 가장 빠른 성취도를 이룰 수 있는 역혈기공(逆穴氣功)이었다. 운기 조식을 할 때 일상적인 방향과는 반대로 내공을 몸에서 일주천시킨다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내공을 쌓게 된다는 것을 알아낸 이후, 마교는 이 기공을 통해서 수많은 고수들을 배출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역혈기공의 기법들이 개발되었고, 또 그에 다른 패도적인 마공들이 많이 개발되어 정파인들의 숨통을 끊어 놨다.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 것은 좋은 점도 많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로 주화 입마(走火入魔)에 빠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빠른 기술일수록 그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그 때문에 마교에 처음 입문한 무사들은 가장 바르게 내공을 쌓는 기술을 사용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가 되면 좀더 안전한 방법으로 바꾸어 수련하다. 따라서 마교에는 각 단계별 고수들에게 맞는 체계적인 심법들이 있었다. 잘못하면 지금까지 고생해서 쌓은 내공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쳐야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생기는 이점은 주화 입마의 위험도를 잊어버릴 만큼 대단하다. 마교에서는 20대에 절정 고수가 될 수 있을뿐더러 30대에 초절정 고수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래서 마교의 고수들은 외가의 무공보다는 장풍(掌風), 지풍(指風), 검풍(劍風), 검기(劍氣)등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내가의 무공을 많이 사용했고, 특히나 패도적인 장풍을 쏘아 내는 기법들이 발달해 있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산공(散功)의 위험이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 놓은 내공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 고통의 시간은 내공을 얼마나 쌓았느냐에 따라 다르며 절정의 고수일수록 고통의 시간은 증가한다. 하지만 마교에서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산공은 늙거나 병들어서 죽기 일보 직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교의 고수들은 정파의 고수들처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를 염원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일정 수준 이상 무공을 쌓고 나면 벽에 막힌 것처럼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을 마교의 고수들은 ‘보이지 않는 벽’이라고 불렀는데, 그 벽을 뚫으면 마(魔)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극마(極魔)의 경지로 들어설 수 있다.

정파에 삼경의 고수가 있듯이 마교에서도 그들이 익히기를 염원하는 경지가 있다. 그 첫째가 마인(魔人)의 정점인 극마의 경지다. 이 경우 역시 온몸이 무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환골탈태를 경험하며, 그를 통해 반로 환동한다.

극마의 고수는 마기(魔氣)를 몸 안에 고루 갈무리하여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마기만으로 사람들을 전율시키는데, 내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투지를 잃고 보통 사람들은 생명을 잃기도 한다. 또 마음먹기에 따라 완벽하게 마기를 몸 안에 갈무리하여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뿜어 낸 마기만으로 능히 주변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극마의 경지는 정파의 화경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현존하는 극마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네 명이며 사람들은 이들을 4마제(四魔帝) 또는 4천왕(四天王)이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그들은 보통 때는 마기를 거의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기분이 나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살인적인 마기를 밖으로 흘린다. 그렇기에 그것을 보는 수하들은 피가 얼어붙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탈마(脫魔)의 경지로, 마인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탈마의 경지에 이르면 만독 불침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직 탈마에 이른 고수는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기에 극마의 경지가 화경과 비슷한 점에 착안하여 탈마의 경지를 현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 경지가 탈마로 불리는 이유는 모든 마인이 두려워하는 산공을 겪지 않는 수준일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의 최고 경지라고 볼 수 있다.

그 윗단계는 없는데, 일부 마인들은 극마와 화경이 비슷함에 착안하여 만든 경지가 탈마인 만큼, 탈마의 위는 아마도 정파의 생사경과 같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들은 무공의 시작은 다르지만 마지막은 같은 것으로 종결지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탈마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그 추측은 어디까지나 일부 마인들의 망상일 뿐이라고 정파에서는 일축하고 있다.

- 《묵향 1》/ 전동조. 명상, 1999. 7-14 p.- 

판타지와 무협을 믹스해 퓨전 장르의 시작을 알린 《묵향》의 서문입니다. 주인공 묵향은 중국의 무인으로 1부는 정통 무협을 다루고 있습니다. 2부는 묵향이 이계로 들어가는 판타지입니다. 3부에서 묵향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판타지와 무협이 섞여서 등장하는 퓨전장르가 됩니다. 전체적인 카테고리로 본다면 판타지의 영역이 맞으나 1부는 정통 무협이므로 무협장르의 핍진성을 살펴보기 위해 서문 전체를 인용했습니다. 

달마대사, 9파 1방을 비롯한 무공의 원류부터 검법, 도법, 창법, 봉법, 권법, 장법에 이르는 발전과정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외에도 내공심법이나 고수들이 거치는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협과 판타지가 섞여 나오므로 헷갈릴 것을 걱정한 작가가 무협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작품의 첫머리에 서문이라는 형태로 긴 글을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의 서문을 읽으면서 독자는 현대의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현상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내공, 갑자, 경공, 9파 1방, 표국, 강시, 음약, 고독, 내단, 공력과 같은 용어를 자연스레 받아들입니다. 중국의 소림사가 관광지로 존재하는 것이나 마약 성분의 음약(춘약)이 현대에도 없지는 않지만 한걸음에 천리를 내닫는 경공이나 숙주의 몸에 기생하며 주인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드는 고독, 몇 갑자의 공력을 단숨에 상승시키는 내단 같은 물건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과거에도 그 존재가 입증된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이처럼 무협장르는 핍진적인 요소를 많이 확보하고 있으며 의문을 표하는 독자는 없습니다. 있더라도 무협을 처음 접하는 초보독자 뿐입니다. 

2) 판타지 

머리말 

가운데땅과 불사의 땅에 관한 이 백과사전은 J. R. R. 톨킨의 세계에 대한 안내서로 집필되었다. 이것은 우리 문학에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세밀한 가상의 세계와 신화 체계를 탐구학기 위한 수단으로 이 책을 이용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러 해 동안 톨킨 세계의 여러 측면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독자들이 톨킨의 세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질문, 곧 ‘어디서, 언제, 그리고 왜’에 대해 답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톨킨의 수많은 원고와 편지가 사후에 출판되고 난 뒤였다. 

1950년대에 쓴 몇 통의 편지에서 톨킨은 그가 그린 세계의 위치에 대해 사람들이 종종 혼란스워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가운데땅을 다른 행성이라고 생각하는 평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는 그 세계의 위치에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런 결과를 의아하게 받아들였다. “가운데땅은 가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이름(Middle-earth)은 midden-erd에서 유해된 middle-erd의 현대형으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 곧 인간이 사는 땅을 가리키는 외쿠메네(oikoumene)의 옛 이름이며, 용례에 있어서는 특히 (동화 속 세계와 같은) 상상의 세계나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십 년 뒤 톨킨은 어느 언론인에게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알려주었다. “사건은 가운데땅의 서북쪽에서 벌어지며, 위도상으로는 유럽의 해안선 및 지중해의 북쪽 해안에 해답합니다…… 만약 호빗골과 깊은골이 (의도한 대로) 옥스퍼드의 위도쯤이라면, 6백 마일 남쪽의 미나스 티리스는 대략 피렌체의 위도에 있습니다. 안두인 하구와 고대 도시 펠라르기르는 고대 트로이의 위도쯤에 있습니다." 톨킨 세계의 비법은 장소라 아니라 시간이다. ”내 이야기의 무대는 이 지구,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지만 역사적 시기는 가상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편지의 다름 구절, ”가상의 시간은 내가 창조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공간에 있어서는 나 자신의 어머니 대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가상의 시간은, 기록된 인류 최초의 역사와 기록된 역사적 문명의 발흥 직전에 있는 신화의 시간이다. 그것은 공기와 빛에 둘러싸인 평면의 행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창조 신화에서 시작한다. 그곳에는 신에 해당하는 발라와, 요정, 난쟁이, 그리고 엔트와 오르크들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실재로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이 세계의 역사는 30,000년이나 지속된다. 그리고 다시 3,900년이 흐르고 난 다음에 아틀란티스와 같은 누메노르 문화가 지각 변동으로 파괴되면서 이 신화의 세계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구형의 세계로 변한다. 톨킨의 연대기에 남아 있는 이후 4,000년 동안의 사건들은 그 시점에서 ‘마침내 그리고 필연적으로 정규의 역사로’ 이어지도록 계획되었다. 

이 모든 창작과 재단(裁斷)은 톨킨의 세계에 대한 세 번째 명백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톨킨은 왜 가상의 시간 속에 새로운 역사(혹은 신화적 전사前史)를 부여함으로써 우리 세계를 근본적으로 재창조하려고 하였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다시 그의 개인 서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내 조국의 빈곤이 슬펐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수준의 이야기, 다른 나라의 전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희랍어와 켈트어, 로망스어, 그리고 독일어, 스칸디나비아어, 핀란드어로 된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싸구려 책자에 나오는 초라한 것을 제외하면 영어로 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톨킨 필생의 야심이었다. 이에 대한 집념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톨킨의 서사소설『반지의 제왕』이 이룩한 의심할 바 없는 문학적 성과도 부차적인 관심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소설도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톨킨의 생애와 작품을 조금만이라도 분석해보면 그의 최고의 열정과 최상의 야망은 영국인을 위한 완전한 신화 체계의 창조에 모아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거대한 우주 기원에 관한 것에서부터 낭만적인 동화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서로 연결된 전설의 체계를 만들 생각이었고…… 이것을 오로지 영국, 나의 조국에 바치고자 했습니다.”

이 작업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쓰기 전에 먼저 희랍의 신화와 역사 전체를 창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톨킨이 실제와 자신의 야심을 놀랄 만큼 달성해냈나는 점이다. 『호빗』이 출판된 지 겨우 50년이 지난 오늘날, 톨킨의 호빗은 레프러콘(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붙잡으면 황금단지를 숨긴 곳을 알려준다는 작은 노인 모습의 요정)이 아일랜드인들에게, 노움(땅신령, 땅속의 보물을 지킨다는 늙은 난쟁이)이 독일인들에게, 트롤이 스칸디나비아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확실한 영국적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사실상 이제는 호빗이 톨킨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호빗이 언젠가부터 항상 우리 곁에 있어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에 들어온 톨킨의 창조물은 호빗만이 아니다. 오르크와 엔트, 발로그가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분명한 것은 애매하게 인식되어오던 수많은 신화 속의 존재들을 톨킨이 쉬지 않고 재정의를 내리고 또 정형화했다는 점이다. 요정과 난쟁이는 이제 톨킨 때문에 매우 다른 인물이 되었고, 간달프는 천 년째 신화가 형성되어가고 있는 멀린(중세 아서 왕 전설과 로맨스에 나오는 마법사이자 현자)만큼이나 완전한 마법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톨킨이 창조한 세계의 더 많은 것들이 우리 세계로 밀려들고 있다. 컴퓨터는 간달프로 불리고 있고, 호버크라프트는 샤두팍스, 서점은 빌보, 식당은 프로도, 보석상은 김리, 활 제조업자는 레골라스, 미용실은 갈라드리엘, 다국적기업은 아라고른이라 불리고 있으며, 컴퓨터게임에도 곤도르, 로한, 임라드리스, 로스로리엔이라는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다. 

톨킨은 자신의 신화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상업적으로 이용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신화와 전승에 매료당한 사람들이 좀더 전문적인 매력을 느끼기를 희망한 바 있다. 영국을 위한 신화를 창조하겠다는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바로 그 편지에서 톨킨은 또한 자신의 야심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을 드러내 보이며, 자신의 현란한 상상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만든 세계에 참여하기를 얼마나 희망하고 있는지를 밝혔다. 

“나는 그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는 충실하게 그려내겠지만, 많은 이야기는 구도만 잡아 밑그림만 그려줄 것입니다. 각 편의 이야기들은 장엄한 전체에 연결되어야 하겠지만, 다른 생각과 손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물감과 음악과 드라마를 휘두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톨킨은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많은 ‘다른 생각과 손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작업을 해왔다. 그의 글은 화가와 음악가들에게, 그리고 극화(劇化)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 백과사전의 주요 구성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히 그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들의 독창적인 회화와 그림은 계속해서 톨킨의 세계를 조명하고 또 찬양할 것이다. 

- 《톨킨 백과사전 (원제: Tolkien : The illustrated encyclopedia)》/ 데이비드 데이 지음. 해나무. 2002. 6-8 p. - 

요정과 엘프, 난쟁이, 드워프, 드래곤과 마법사로 대표되는 판타지 장르의 창시자 톨킨의 집필 목적은 신화가 없는 조국 영국을 위한 신화의 창조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는데, 스스로 창조한 세계관과 등장인물은 물론 “애매하게 인식되어오던 수많은 신화 속의 존재(위의 인용에 의하면 요정과 난쟁이)”들을 “재정의하고 정형화면서” 핍진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존재를 정형화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 각도로 해석이 가능한 캐릭터를 고정시키면 상상력의 크기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즘 같은 다변화시대에 정형화된 캐릭터는 죽은 캐릭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톨킨이 자신의 작품을 모태로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길 기대한 것처럼 전통은 만들어졌고, 질서는 전통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3) SF 

클라크는 1917년 영국의 마인헤드 시에서 태어나 런던의 킹스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최우등생이었고 졸업후 영국 왕실 천문학회 정회원이 되어, 영국 행성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2년간(1948-50) 물리학요람(Cosmic Search)의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원제: 2001 A space odyseey)》/ 아서 C. 클라크. 한양출판, 1990. 《추천의 글》중에서 - 

과학 기술의 발달이 눈부신 이 시대에 1970년대말에 씌어진 이 ‘과학 소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옮긴이의 생각은 ‘천만에!’다.

옮긴이가 보기에 그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은데, 하나는 작가 아서 C. 클라크의 정밀한 과학적 지식이다. NASA의 자문까지 지낸 실력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 정도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고, 그런 현실적 기초 위에 황당하지 않은 이야기를 지어냈기 때문에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과연 과학 소설에도 낡지 않은 고전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 《낙원의 샘 (원제: The fountains of paradise)》¹ / 아서 C. 클라크. 시공사, 1999. 《옮긴이의 말》중에서 p. - 

아서 C. 클라크가 우리 문명에 기여한 최고의 공로는 단연 통신위성에 대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영국공군의 레이더 장교로 재직하던 1945년, 《Wireless World》라는 단편에서 적도 상공 36,000Km(오늘날 정지궤도로 불리는)에 인공위성을 띄운다면, 위성은 24시간에 지구 주위를 1회전하게 되고, 위성이 마치 하늘의 한 점에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임을 지적하였다. 인공위성 3개를 120도 간격으로 띄운다면, 그것으로 지구의 모든 통신을 관장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한 아이디어는 본 소설 《낙원의 샘》에도 등장하고 있다. 

미국은 이 아이디어를 시험하기 위해 1960년 최초의 실험통신위성 에코1호를 발사하였고, 1962년 최초의 실용통신위성 텔스타1호가 1,000회선의 전화와 최초의 대서양 횡단 TV중계를 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상용정지통신위성 얼리버드가 정지궤도에 오른 것은 1965년이었다. 오늘날은 다수의 저궤도 통신위성을 이용한 범세계적인 개인 휴대통신이 등장하여, 사막이건 바다건 세계 어디에서건 통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통신위성은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고, 세계 어디에서 일어나는 일이든지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서 C. 클라크는 통신위성이 세계 정치에 존 공헌에 대해, 그가 세계 평화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공을 기려 1994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다. 

- 《낙원의 샘 (원제: The fountains of paradise)》/ 아서 C. 클라크. 시공사, 1999. 《아서 C. 클라크 라는 작가》중에서 p. - 

소설에서는 우주선 디스커버리 호의 목적지가 토성의 많은 위성 중에 가장 수수께끼로 남은 제이페투스였다. 토성계는 목성을 경유하여야만 도달할 수 있다. 자세히 말하면 디스카버리 호는 그 거대한 목성에 근접하여, 목성의 엄청난 중력장을 이용, 고무총을 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어내고 또한 여행의 다음 단계를 위한 가속력을 얻게끔 되어 있었다. 

바로 이와 똑같은 방법이 1979년의 보이저 우주 탐사선에 활용되었다. 

- 《2010: 오디세이 II (원제: 2010)》/ 아서 C. 클라크. 모음사, 1992. 《서문》중에서 - 

소설이 현실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광고 문구 같지만 SF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많은 SF 작가가 과학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아서 C. 클라크는 공군 장교출신으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로봇》시리즈와 《파운데이션》시리즈로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는 생화학 교수였으며, 하드 SF(철저한 논리와 과학적인 사실에 입각해 쓰여진 SF소설)로 유명한 할 클레멘트는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습니다. SF에 나오는 아이디어는 시간이 지나면 현실이 됩니다. 무협이나 판타지와 달리 SF의 핍진성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확률이며 미래의 거울입니다. 

영화 《페이스 오프》가 처음 소개됐을 때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개에게 물어뜯긴 이자벨 디누아르(30)라는 여성이 뇌사자의 얼굴을 기증 받아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을 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한 작품에 등장한 아이디어가 핍진성을 획득하면(기술의 부족으로 당장 만들 수는 없지만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면) 정형화되어 다른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공학 3원칙입니다. 

로봇 공학의 세 가지 원칙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인간이 해를 입을 위험에 처하게 해서도 안 된다. 

2. 로봇은 제1법칙을 어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3. 로봇은 제1법칙과 제2법칙을 어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 《양자인간 (원제: The positronic man)》/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실버버그. 동아출판사. 1994. 10 p. - 

사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관련 작품을 읽어보면 로봇 공학 원칙은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입니다. 로봇 공학 0원칙,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또는 위험을 지나침으로써 인류가 해를 입도록 하지 않는다 가 수정, 추가되었습니다. 1원칙이 발전해서 0원칙이 만들어지는데, 인간들의 집합체인 인류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해쳐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이 불완전한 원칙을 다룬 몇 편의 소품이 재미있습니다. 

40만원대의 청소 로봇이 홈쇼핑에서 팔리고 100만원대의 교육용 로봇이 상용화되는 시대에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과 자의식을 가진 로봇의 반란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로봇 공학 3원칙은 이러한 때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로봇 공학 3원칙을 알고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었고, 로봇 공학 원칙에 덧붙여 새로운 원칙도 만들어졌습니다. 즉, 핍진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로봇 근원 원칙. 로봇은 로봇의 행동이 로봇 공학의 원칙에 입각하지 않는 한 행동하여서는 안 된다. 

제4원칙. 로봇은 로봇공학 상위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프로그램된 임무를 행해야만 한다. 

로봇 생산 원칙. 새로운 로봇의 행동이 로봇공학의 원칙에 입각하지 않는 한 로봇은 제조되거나 디자인되어선 안 된다. 

비과학적이어도 핍진성을 획득한 개념은 많습니다.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광선검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미 검증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스타워즈의 광선검

20여년 전 영화‘스타워즈’에서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크가 벌인 결투에서 사용된 광선검(light saber) 소품이 베버리힐즈 영화기념품 경매에서 6만 달러(약 6,000만원) 이상의 가격에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소식이다. 광선검은 제다이 기사들의 포스와 결합돼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스타워즈의 상징물처럼 여겨지는 무기다.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이용해 막대 빛을 튀어나오게 하거나 길이를 조정하기도 하는데 고대 제다이의 거점으로 알려진 오수스 행성에서 가져온 수정의 색에 따라 광선검의 색도 바뀐다고 한다.

현실에서도 이런 광선검을 만들 수 있을까. 광선검의 외양은 매우 밝은 형광등, 혹은 형형색색의 빛을 만들어 내는 밤거리의 네온 사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이런 방전 램프들은 유리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에서 빛이 방출되기 때문에 제다이 기사들이 한 번만 휘둘러 부딪치게 되면 몸체가 산산조각나 버릴 것이 분명하다.

광선검 손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선의 또 다른 강력한 후보로는 ‘레이저’를 들 수 있다. 레이저는 퍼지지 않고 똑바로 진행하는 성질인 직진성이 강하고, 단위 면적당 에너지의 강도도 매우 높은 빛이다. 이런 특성으로 금속을 절단하거나 용접을 하는 산업용 레이저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레이저로 광선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그 어떤 빛으로도 광선검을 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빛의 성질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될 수 있다.

요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레이저 포인터로 레이저빔을 발사하면 이 빛은 초속 30만㎞라는 엄청난 속도로 공간을 날아간다. 직진성에 의해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레이저빔은, 강도가 충분하고 경로 중간에 장애물이 없다면 달의 표면까지도 갈 것이다. 때문에 스타워즈의 광선검처럼 일정한 거리까지만 날아가는 빛을 만드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설사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강력한 빛을 만들어 낸다 해도 스타워즈에서 볼 수 있었던 현란한 결투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광선검의 길이 만큼 레이저빔을 가두기 위해 검의 끝에 반사경 역할을 하는 거울을 놓는다고 치자.(공중에 거울을 어떻게 고정시킬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이렇게 만들어진 레이저 광선검을 갖고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크가 결투를 벌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개의 광선검이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은 검의 충돌로 인한 반발력을 예상해 몸 상태를 준비하겠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충돌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검을 내리친 방향으로 넘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빛을 구성하고 있는 광자(光子·photon)는 상호작용이 전혀 없어 서로 부딪치더라도 그냥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레이저를 손에 쥐고 휘두른다 해도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광선검과 관련된 또 하나 옥의 티는 광선검이 우리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직진하는 빛을 측면에서 보려면 빛이 떠도는 먼지 등에 의해 산란(散亂)돼야 한다. 그런데 광선검이 사방팔방으로 내뿜는 빛의 세기는 산란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다. 먼지나 공기 분자가 전혀 없는 우주 공간의 전투장면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레이저빔, 그리고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인 공기가 전혀 없는데도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우주선의 모습 등은 우주를 소재로 다룬 SF영화들이 저지르는 실수들 가운데서도 단골 메뉴다.

그렇다면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은 어떻게 연출한 것일까? 오직 컴퓨터 그래픽 기술만 이용해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오늘날에는 광선검 정도를 처리해 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1970년대에는 쉽지 않았다. 결국 배우들로 하여금 막대기를 들고 싸우게 한 뒤 광선검 애니메이션을 그려 넣는 ‘로토스토핑 기법’이 사용됐다고 한다.

- 2005. 8. 24일자 《한국일보》 고재현(한림대 전자물리학) 교수의 《빛으로 보는 세상》 중에서 - 

몇 세기가 지나도 이루어질 수 없는 핍진적인 개념들도 많습니다. 워프 개념(차원과 차원을 종이 구부리듯 지나가는 것), 아공간 통신(광속을 넘어선 통신 속도, 물리학적으로 광속을 넘어서는 속도는 만들어 낼 수 없음), 아공간 이동, 지구에서 기원한 인간종족들의 집합체를 가리키는 인류의 개념(이것은 인류가 다른 행성을 개척해야만 실현 가능함), 행성을 오가는 우주선, 외계생명체, 지나친 자원 개발로 멸망한 행성(지구의 앞날을 예견하는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핵폭발로 빙하기에 돌입한 지구(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미래의 일임), 사이보그, 인조인간, 두뇌이식 등등. 이런 개념들은 수많은 소설, 영화, 만화, 에니메이션에 보이는 SF만의 핍진적인 요소입니다. 

4) 추리/탐정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은 여섯 번째 장편으로, 크리스티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범인의 의외성이 놀랍고 흥미롭다. 펀리에 사는 로저 애크로이드가 살해되자 사건 해결을 위해 포와로 탐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마을 의사인 셰퍼드가 포와로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사건을 기록한다.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용의자로 떠오르지만 독자들은 범인이 누군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이 작품에 대해 논쟁이 구구했었다. 이야기 전개 방식이 추리작가 로저의 직업적 윤리에 위배되었다든지, 정당한 게임, 즉 페어 플레이가 아니라는 등등의 비난이 일었다. 미국 추리소설계의 거장 반 다인은 이러한 전개방식이 떳떳치 못한 방법이라고 비난하였다. 반면에 영국 추리계의 거장, 도로시 세이어즈는 트릭이 훌륭하며 작가가 독자를 속인 것이 아나라 독자가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이 작품을 옹호하였다. 크리스티는 독자나 평론가들의 이러한 비판과 불평에 대해 자신은 충분한 단서를 제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원제: The murder of Roger Ackroyd)》 / 아가사 크리스티. 고려원미디어. 1992. 《해설》중에서 - 

추리/탐정 장르의 핍진성은 "가장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범인"이라는 점입니다. 이 패턴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하나씩 제외하며 읽는 것이 추리소설의 보편적인 독서법일 정도로 일상적입니다. 소설의 중후반까지 유력한 용의자가 떠오르다가 작은 단서 하나로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 되는 흐름은 사건이 일어나면 면식범이나 주변인물부터 수사해 나가는 실제 수사방법과는 정반대입니다. 추리소설의 핍진성은 단순하지만 현실과 정반대라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5) 로맨스 

이성애 또는 게이 로맨스의 대표적인 핍진성은 신데렐라 플롯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신분의 차이, 빈부의 차이, 외모의 차이, 계급의 차이가 로맨스에서는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신데렐라에 질린 나머지 그렇지 않은 작품만을 골라서 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대세이며 흔합니다. 그러나 신데렐라는 현실에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신데렐라”입니다. 

두 번째 핍진성은 착한 여자 콤플렉스입니다. 주인공은 착하고 희생적이며 인내심이 많습니다. 게시판에 “못된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찾는 질문이 올라올 정도로 주인공의 성격이 무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착한 여자는 빼앗기고 당하는 여자일 뿐, 돈 많고 잘생긴 킹카를 획득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사랑을 테마로 한 장르의 특성상 권선징악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못된 주인공이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개과천선 할 수도 있고……. 뭔가가 다르면 재미가 있든/없든, 작품성이 있든/없든 신선해 보이는 법입니다. 

6) 패러디 

핍진성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리뷰한 작품에 패러디가 두 작품이나 들어 있어서 추가했습니다. 패러디 장르는 원작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작품을 제대로 감상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원작이 장르문학이라면 독자는 원작의 핍진성을 그대로 수용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원작과 패러디의 관계를 정립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장르별 핍진성을 살펴봤습니다. 각 장르는 독특한 핍진성을 갖고 있으며 독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핍진성은 장르의 특성을 살려주기도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진부하고 식상한 소재로 둔갑할 위험이 있습니다. 

주1. 낙원의 샘 : 아서 C. 클라크의 SF 소설. 감탄하며 읽고 난 후, 그림까지 그려가며 리뷰를 썼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리뷰는 "추천도서 --> 시공 Gryphon books --> 13번 낙원의 샘"을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