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

공녀 (영언문화사, 2000)

혼인을 앞둔 예영에게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닥쳐온다. 원의 황실에 공녀로 가게 된 그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스스로의 언약을 가슴에 묻고 모진 고초를 다 이겨낸다.

마침내 원의 대도성에 도착한 그녀는 오로지 탈출만을, 그리운 고향땅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순간만을 꿈꾼다.

그러나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황실의 친군대장 샤하이가 앞을 가로막고, 그녀는 어느 순간 바람을 등진 그의 모습에 안쓰러워 하면서도 그를 마음에 담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토록 믿었던 오라비들의 어두운 속내를 알고 난 뒤 그녀의 연약한 마음에 다시 황야의 거친 바람이 몰아치고, 그녀는 마지막 삶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런 그녀의 가슴속으로 샤하이는 끊임없이 따뜻한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고, 마침내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속 깊이 받아들인 순간 그녀는 또 다른 거친 파도에 휩쓸리고 마는데…….

review :

작품을 읽고서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한 나라가 망하여 그 백성들이 정복국가의 노예가 되는 일은 흔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로마에 그랬듯이. 오히려 고려가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던 원나라에 망하지 않고 사위 나라가 된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제가 가슴이 답답해진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슬픔과 고통, 포기와 한숨이 같은 피가 흐르는 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분석해보면 작가는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세 가지 플롯으로 예영이 샤하이의 아내가 된 후로 자칫 느슨해질 우려가 있는 스토리를 탄력적으로 이어가면서 작품을 반전시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영의 감정적인 부분을 다룬 것인데, 바로 오라버니들의 숨은 의도입니다. 예영은 그 의도를 파악한 후 진정한 샤하이의 아내가 됩니다.

두 번째는 작품의 구조상 필요한 부분으로 샤하이의 결혼입니다. 결혼식장에서의 사건을 계기로 작품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작품의 배경을 정치적으로 보충한 부분으로 황제와 샤하이의 관계입니다. 이것으로 반역자의 아들을 황제가 총애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작가는 1인칭 시점을 사용하고 있으며 예영의 나레이션으로 작품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이상히 여겼으나 결말을 제외하고는 작품 전반에 걸쳐 두 주인공간에 대화가 없는 점을 생각한다면, 작가가 이 방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얼마만큼 표현하고 있는가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10퍼센트? 20퍼센트? 확실한 것은 책을 읽을 당시에 느낌 감동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녀> 예외는 될 수 없군요.......

명취설향(영언문화사, 2003)

곧 죽어도 선비이고자 하는, 올곧음이 지나쳐 똑 부러질 것만 같은 인물 이정명.

술도 멀리허고 여색도 멀리하다 결국 부인을 화병으로 보내고 집안의 대를 끊어놓게 생겼다.

눈물로 호소하는 부모님을 어쩌지 못한 정명, 평안감사로 부임해 가는 친구를 따라 평양으로 향한다.

감사를 환영하는 큰 잔치가 벌어지고 조선팔도 최고로 손꼽히는 설향의 검무가 하이라이트로 펼쳐지는데…….

눈앞이 어찔어찔, 머리가 빙글빙글. 손에 든 맹물이 독한 술인 양, 취기가 오른다!

검무로는 조선팔도 제일가는 기녀 설향은 기가 먹히고 코가 막힐 따름이다.

꼴 같지도 않은 먹통 선비 하나가 한창 흥이 오른 춤을 중지시키는 것도 모자라 온갖 모욕까지 서슴지 않다니!

마침 새로 부임한 평양감사, 꽉 막힌 이 친구 정명에게 '음양의 이치'를 깨우쳐 주고자 하니,

오호, 음양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어찌 진정한 선비이길 자부할까?

바로 내가 한 수 자르쳐주리라. 평양 최고라는 설향의 이름을 걸고!

햄릿의 연인(아름다운날, 2001) - 제2회 신영미디어 로맨스 소설 공모 장려상 수상

소문난 바람둥이인 진규혁은 지성과 미모를 두루 갖추고 성격까지 좋은 완벽한 여자를 원하고 있었고, 햄릿광인 최경지 또한 진정한 햄릿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상태였지만…….

오래 전 집안 어른들끼리 한 약속 때문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해야 할 처지가 된 경지는 심란한 마음에 혼자서 술을 마시다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선배 규혁을 만난다.

규혁 역시 심장병으로 쓰러진 아버지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던 터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마침내 계약 결혼에 동의하는데……

작품을 읽다가 여러 번 웃었습니다. 경지는 옆집에 사는 똑똑한 언니 같고 규혁은 언젠가 만나본 킹카 -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림의 떡이었지만 - 같습니다. 생활에서 한 두 번쯤 마주친 사람들이 등장하니 생동감도 있고,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경지의 직업적인 면이 잘 부각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실제로 경험했거나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한 것 같습니다. 규혁의 일도 약간 더 자세하게 파고 들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경지와 비교했을 때 뭐랄까요…… 날린 느낌이 듭니다.) 몇 장면에서는 작가의 말대로 '할리퀸을 답습한 구성' 이 눈에 띄지만 책을 읽다가 현실로 돌아올 정도로 튀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혼인신고에 대해 잘못 나와 있는 부분이 있어서 바로잡습니다. 구청 호적계에 전화해 보니 혼인신고서는 우편으로도 접수가 가능하며 혼인신고서가 작성되어 있는 한 결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혼인신고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랍니다. 또한 혼인신고시에는 결혼 당사자들의 호적등본이 필요합니다.

편집부 여러분들도 수고하셨습니다. 5000원 짜리 6500원으로 만드느라(이 책이 신영의 공모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작품 - 중편분량 - 임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페이지를 늘이려면 여백에 그림이라도 그려주세요. 색칠이라도 하게.

PS: 작품에 나온 경지의 주소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혹시 팬레터 받는 곳인가요?

아래의 글은 아름다운날의 답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김지혜씨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분량을 더 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는 다른 작품(단편)을 하나 더 넣을 계획도 했었지만, 햄릿의 연인의 분위기와 너무 달라서 본작품의 재미를 죽인다는 판단으로 출판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앞으로는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작품들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름다운날에서 나올 국내 로맨스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흑우(영언문화사, 2001)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장례식, 부인을 넷이나 두었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거짓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비웃던 박진후는 하얀 얼굴에 무심한 눈동자를 지닌 서연경을 본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그녀에게 그는 하염없이 빠져들고 만다.

원하지 않는 재벌의 상속 싸움에 말려든 연경은,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연지를 감싸안고 탐욕스러운 군상에 홀로 맞선다. 하지만 자신의 전부인 동생을 지키려면, 비열한 박진후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의 욕망을 알면서 그에게 가야 하는 기로에서, 그녀의 선택은…….

review:

<연애소설이란 무엇인가>에서 로맨스의 요소로 네 가지를 꼽고 있습니다. 첫째, 사랑이 소설의 구성상 전면적인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나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셋째, 인간간의 깊은 이해나 화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넷째, 연애관이 확실해야 한다. 미국의 RWA(Romance Writers fo America)협회에서 꼽는 로맨스 소설의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남녀간의 사랑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둘째, 감정적인 만족을 주어야 한다. 셋째,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요소가 있는데, 바로 "뭔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입니다. 로맨스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주제이므로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분위기를 많이 풍깁니다. 그러나 이것만 강조하다보면 말초적이고 순간적인 여운만 남기고 끝나기 일쑤입니다. 로맨스의 플롯으로서 자주 사용되는 신데렐라 컴플렉스나 착한 여자 컴플렉스는 현실의 독자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을 줄지는 모르지만 작품에서 묘사되는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일상 생활에서 신데렐라가 탄생할 확률은 일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낮습니다)과 주인공(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사표가 아닙니다)은 그만큼의 거리감과 위화감을 줍니다. 로맨스의 태동기에는 이런 작품들이 먹혀들었을지 모르지만 양산 체제가 갖추어진 요즘에는 두 남녀의 사랑만으로 독자들에게 어필하기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애절하고, 눈물나고, 감상적이더라도 말입니다. 킬링 타임을 목적으로 한 책읽기를 제외하고,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흑우>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읽는 순간에는 재미있고, 자극적이지만 책을 덮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일반적인 도덕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진후의 행동(여동생을 미끼로 언니를 유인하고 사촌의 약혼녀가 될 여자를 돈을 미끼로 가로채는)과 '아내 따로 정부 따로'의 사고방식, 조직폭력배 같은 진후의 작은아버지와 그 주변 사람들의 행동(살인, 납치, 협박), 여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공하는 연경의 행동을 보면서 읽을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부각시키는 것도, 주인공이 시련을 당하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부분이랄 수 있는 '재벌의 선행'이 결국 연경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보면서 로맨스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여기까지가 작품에 대한 감상이었고, 이번에는 플롯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품에서 과거가 언급되는 것은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자란 사람은 끊임없이 부를 추구하며, 못생기고 뚱뚱한 미운 오리가 어느 순간 백조로 자란다면 대부분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못생겼다는 착각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추근대를 여자들을 경험했다면 그는 자신의 성적 매력에 한 순간도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즉, 과거는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흑우>에서는 연경의 과거에 대해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어린 시절의 성희롱과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녀가 여동생 연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반영이 되지만, 어린 시절의 성희롱은 현재 그녀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나나를 싫어하는 것 외에(바나나야말로 과거의 영향이 가장 미미하게 반영된 것이 아닐까요), 진후와의 육체적인 관계에서도 타인과의 접촉에서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과거를 들먹여가며 지면을 할애할 이유가 없습니다. 독자들에게 과거의 사건을 툭 던져놓고 - 사건이 사건이니 만큼 뭔가 놀랍고 대단한 것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잔뜩 품게 해놓고 - 별다른 설명 없이 지나가는 것만큼 맥빠지는 일도 없습니다.

PS: 여담입니다만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흑흑 울어서 <흑우>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