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2부작

1편 《카타리나》

2편 《POST 카타리나》

작품연표

10일간의 계약 (영언문화사, 2002)

추운 기운이 가시고 눅눅한 빗줄기와 함께 봄이 왔지만, 희원에게는 주위가 온통 살얼음 언 겨울일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술에만 의지해 세상을 등진 아버지, 병원에서 희망을 접은 채 멍하니 천장만 응시하는 남동생...

그런 그녀 앞에 무섭도록 차가운 기업 사냥꾼 독고현이 나타난다. 그리고 기업을 인수하듯 돈으로 그녀를 사려한다. 그를 경멸하면서도 현실에 떠밀려 하룻밤을 포기하고 마는 희원. 그 하루를 잊으려 봄을 앓는 그녀에게 현을 놀라운 제안을 들고 다시 접근해온다. 그리고 시작된 10일간의 계약. 희원은 자신을 버리고 마음을 닫으려 애쓰지만, 어느새 그 틈새로 봄의 향기와 함께 따스한 바람이 스며드는데...

경성애사 (영언문화사, 2001)

총독부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명문가의 막내아들로 어두운 시대와 세상을 외면하며 지내는 선우완. 그는 술의 힘을 빌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갈 뿐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에 취해 여인숙에 곯아떨어진 어느 날 잠결에 여인의 기척을 느끼고 거침없이 달려든다. 그리고 거세게 반항하던 그녀의 검은머리와 초롱한 눈망울에 대한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한편 순사에게 쫓기던 여경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낯선 남자의 잠자리에 뛰어든다. 세상을 외면하고 오로지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던 선우완은 여경으로부터 경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우완은 봉변을 당하고 있는 여경을 구하고 자신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라며 청혼을 하는데....

review:

저는 대하소설 두 질을 가지고 있는데 야마호까 소하찌의 과 박경리의 가 그것입니다. 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는 일제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웬만한 역사책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이 책들은 심심할 때마다 꺼내 읽어서 몇몇 대사는 그대로 외울 정도입니다.

이 작품을 읽고 동일한 시대의 작품 두 편이 생각났습니다. 박경리의 와 김혜린의 . 에는 동시대를 살아낸 작가의 리얼리티가 생생히 살아있으며, 는 소설이 표현하기 힘든 비주얼적인 측면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경성애사>에는 에서와 같은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인 어투와 캐릭터의 성격, 그리고 일본어가 공용으로 사용되던 당시를 단지 몇 개의 일본어 명사로 대신했다는 점 외에도 작품 곳곳에 숨어 있어서 읽는 내내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게 했습니다. 등장인물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TV나 사진을 보고 그 시대를 묘사한 것과 같은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단지 로맨스에 어울리는 시대배경을 찾기 위해 일제시대를 택한 것인가? 아니면 일제시대를 살아간 젊은이들의 특별한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로맨스를 택했는가? 만일 후자라면 로맨스에는 충실했을지 몰라도(행간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등장인물의 감정묘사와 행동묘사가 나타나고 있는 데서 기인함)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감성을 충분히 그려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안제시보다는 상황인식 쪽에 중점을 둔 듯 한데, 400 페이지가 못되는 분량으로 로맨스와 함께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비주류를 고수하는 선우완의 행동에서 로맨스에 대한 일종의 한계를 느꼈습니다.의도는 좋았는데 작품이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 범작(凡作)입니다.PS: 제목을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광란의 귀공자(영언문화사, 2003, Yourose)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전도유망한 카레이서 현호.

결코 허망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 마리.

어느 날 문득 그녀 앞에 나타난 현호와 꼭 닮은 남자 민석.

현호가 자신을 위해 민석을 보내줬다고 굳게 믿는 마리는 무작정 그를 쫓아간다.

묘하게 도발적인 유혹으로 민석을 한 눈에 사로잡은 마리는 민석의 집에 들어간다.

가슴속에 꽁꽁 묻어 두었던 열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라 버릴 듯 활화산처럼 뜨거운 여자 마리와 속에 야수를 감춘 귀공자 민석의 기묘한 동거는 시작되고, 한 달 후 마리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불고기 그라탕(영언문화사, 2002)

"그럼 왜 나랑 결혼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좋아할 것 같은 여자는 너밖에 없으니까."

"뭐? 뭐라고 했어?"

"지난번에 말한 적 있지? 내가 여자 왜 사귀는지 말했었지?"

"자려고."

"그래, 그건 한순간이지. 겉모양이 예쁘게 보일 때 뿐이야. 늙어지면 싫어질게 뻔해. 그런 여자랑 결혼할 수 있겠어?"

"나중에, 어쩌면 내일이라도 당장, 늙어져도 좋은 여자 만날 수도 있잖아."

"이미 만났다구. 그게 너라구."

review:

주인공 두 사람이 번갈아서 독자에게 말하는 특이한 작품입니다. 새로운 시도는 성공하면 몇 배의 값어치가 있지만 실패하면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서 로맨스에 등장하는 이해 불가능한 오해와 음모, 배신과 같은 플롯에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정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반칙과 편법과 술수를 써서 지름길을 가는 것 같아서 언짢습니다).

이 작품은 서로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며 전개되는 스토리라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만화 캐릭터로나 어울릴 듯한 비현실적인 여주의 성격이 아쉽습니다. 평균작입니다.

PS: 합본으로 실려있는 《POST 카타리나》는 사족같이 보입니다.

석빙화 (북박스, 2002)

세상에서 내가 절대 가져선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이요.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

하늘과 땅을 다 가지고 우주를 한 주먹에 쥐어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없는 것이요.

발아래 구르는 작은 돌맹이나 썩은 풀뿌리 하나조차 내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만 가지만 부족한 게 없을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

review:

가짜 황녀와 그녀를 지키는 무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여주가 가짜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독자들은 작품 뒷부분에 이르러 흥미진진한 반전을 누릴 수도 있었는데, 여기저기 올라온 소개 글을 통해 비밀이 새어나간 것이 아쉽습니다.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여주가 인상적입니다. 그런 여주를 오랜 세월 보살핀 남주가 사랑에 빠지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을 착실히 밟았습니다. 분주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에게 방해를 받아가며 읽은 탓인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조용한 장소에서 차분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평균작입니다.

아라사의 서우여 (영언문화사, 2000)

짙은 어둠 속 촉촉한 달빛에 비친 흑수정눈동자를 본 순간, 번한의 서우여 마휴는 검은 밤 차가운 바람을 안고 막사 안으로 스며들었던 검은 그림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뿌연 안개에 가려진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동자의 신비로움에 빨려들게 되는데....

마한의 수비대장 아라사는 거침없이 큰 걸음으로 들어서는 마휴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느끼지만, 별 어려움 없이 그의 마음을 거부할 수 있으리가 믿는다.

여느 때처럼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걸 수 있다고, 스스로 여인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하지만 거부할수록 오히려 그는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서서히 자리를 넓혀가게 되고,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전사로서의 다짐이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몰아대는데......

review:

상성(相性)이 맞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의 성격이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의 관계라면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가치관과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에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좀더 확장된 개념으로 봤을 때 정서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번역소설을 읽다보면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남의 옷을 빌려입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서가 맞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이서 는 우리 정서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정묘사가 일품입니다. 오랜만에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한껏 활보한 기분입니다. 보기 드문 수작이며, 다음 작품을 기대해 봅니다.

PS : 번역 잘해서 외화 좀 벌어봄이 어떨까요?

아란야의 별빛 (신영미디어, 2001 SY Romance 3)

평화롭던 아란야는 지세븐을 이용한 음모를 꾸미는 과학자 쿠삭에 의해 큰 위기에 처한다. 쿠삭보다 먼저 지세븐을 찾아 보호하기 위해 정령의 도시로 간 제독 하리건은 우연히 숲 속에서 요정 같은 여인 레이아를 만나 마법처럼 그녀에게 빠져들지만, 전사의 서약 때문에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데……

review:

두 남녀의 감정교류보다도 육체적 매력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습니다. 레이아는 특수한 능력을 갖고있는 탓에 운명의 상대를 첫눈에 알아본다 해도 하리건은 첫 만남에서부터 레이아의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세계를 묘사하는데 어울리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찾느라 고심한 흔적이 많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적재적소에 사용되지 못한 몇몇 단어들과 행성을 창조하는데 발생하는 논리적인 오류가 아쉬움을 남깁니다.

1. 제독(提督, admiral) - '제독'은 해군의 함대사령관 또는 해군장성에 대한 통칭입니다. 물이라고는 호수 하나가 전부인 아란야에 해군이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우주선을 지휘하는 함대의 제독이라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작품 전체에 그와 관련된 언급이 없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차라리 '장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낫습니다.

2. 아란야 AD 139년 - 'AD'는 '그리스도의 해(Anno Domini)'를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아란야에 그리스도가 있었을 리는 없고, 지구에서 온 여섯 명의 학자들이 일으킨 문명이라면 그런 의미를 나타내주는 약어(略語)를 사용하던지 그냥 '아란야력(曆)'으로 표기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전작에서는 '서기'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란야의 일년이 지구의 일년과 같은지 궁금합니다. 지구의 일년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 주기에 의해 정해지는데, 아란야도 지구와 똑같은 조건인지(지구와 동일한 주기의 공전을 하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혹시 일년이 50일이라거나 900일 이지는 않을까요? 하루는 24시간인지 4시간인지…… 아란야의 모든 환경을 무시하고 지구의 그리니치시간을 그대로 적용하는가? 그렇다면 왜 139년 간이나 지구의 24시간과 1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란야의 존재가 알려져선 안되기 때문에 통행조차도 금지된 모행성(母行星)의 시간을? 단지 향수(鄕愁)에서?

지구와 동일한 조건이라는 가정을 해도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합니다. 139년 전에 지구의 누군가가 우주선을 타고 아란야로 왔습니다. 그러나 에서 하리건의 여동생 키니가 지구로 왔을 때, 지구는 다른 행성으로 유인 우주선을 보낼만한 과학력이 없었습니다. 아란야에 문명이 생기기 시작한 139년 전 - 지구의 1862년 - 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키니는 아란야에서 지구의 '과거'로 왔었다는 말인가요? (전작을 읽은 지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주선을 타고 오는 도중에 세월이 거꾸로 흐른건가요? (상대성 이론에는 "빛보다 속도가 빠르면 늙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전사(戰士) - 하리건의 뛰어난 전투능력과 그가 맹세한 '서약'에서 작가가 중세의 기사(騎士)를 모델로 삼았고, 또한 기사의 명예를 나타내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전사'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것보다 일반적인 경우는 '군인'을,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은 '전사'로 구분하는 쪽이 작가의 의도를 더 세련되게 독자에게 알리는 방법입니다. 아울러 '제독'이라는 군대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으므로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꽤 오래 전에 어느 신인 감독이 단편 인정극을 찍은 일이 있다. 섬 처녀의 비련 이야기로, 눈물에 젖은 여주인공과 섬 정경에 료오쿄쿠(사미센을 반주로 해 의리나 인정을 노래한 대중적인 일본 창)의 유명한 부분이 한 단락 깔리는 가운데 '빨간 동백이 똑 떨어져'라는 대목이 있는데, 아주 우직하고 정직한 이 신인은 그 부분에 문자 그대로 빨간 독백이 똑 떨어지는 컷을 넣었다.

결국 그 작품은 첫 시사회에서 대폭소를 일으켰다. 너무나도 양쪽이 딱 들어맞아 아무리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 촬영소에서는 촌스럽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사람의 대명사로 '빨간 동백'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 가와베 가즈토의 《드라마란 무엇인가 (원제: ドラマとは何か)》에서 발췌 -

4. 물 -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물이었다. 아란야에는 물이 단 한 곳, 최남단에 있는 아주 작은 호수 하나가 전부였다. 그들은 물 부족으로 힘든 생활을 영위했지만 곧 대체 약품을 개발해 냈다."

2001년 우리나라 기준으로 국민 1인당 물의 하루 필요량은 440리터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드는 생활용수 외에 공업용수, 농업용수, 유지용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40리터에서 생활용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7.6%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행성에 물이라고는 작은 호수 하나 뿐이라면 독자들을 납득시키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대체 약품'이라는 해설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주선을 만들고 외계로 나갈 수 있는 과학력이 왜 인공 비와 인공 호수 생각을 못했을까요? 아울러 '대체 약품'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지 아니면 물이 필요한 모든 부분에 해당되는지 정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약품'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생활용수, 공업용수까지는 커버할 수 있지만 농업용수와 유지용수도 포함할지는 의문입니다. "대체 물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5. 대리석 - "하리건의 집은 하나의 거대한 요새였다. 인적 없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그의 집은 전체적으로 차가운 느낌의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대리석은 상당히 고가이고, 주로 장식용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자연상태에서 화강암에 비해 강도가 약합니다. 작품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이상, 이 경우 대리석이 아니라 화강암을 사용해야 맞습니다

아란야의 요정 (신영미디어, 1999 - 제4회 로맨스 소설 현상공모 가작)

아란야의 폭동으로 위험에 처해지자 키니는 오빠들에 의해 지구로 보내진다. 한편, 실패한 수술로 절망에 빠진 심장전문의 호세는 바닷가 별장에서 바다에 실려온 키니를 구하게 된다. 그는 키니의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하고 맑은 성격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그녀의 이상한 행동과 말을 그저 다른 나라와의 문화 차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카타리나 (아름다운날, 2002)

높고 푸른 하늘에 핏빛 단풍나무 회색 도로에 내려앉은 나른한 햇살 검은 치맛자락을 날리는 짓궂은 바람 그 위에 여자가 있었다.

눈꽃처럼 시린 피부에 새까만 눈동자 허리에 닿을 듯 물결치는 검은머리 이슬방울 뚝뚝 떨어질 듯 달콤한 입술 그렇게 한 떨기 꽃처럼 선 여인을 만났다.

하얀 화선지에 화급히 번지는 검은 먹물 한 방울처럼 심장을 쥐어짜는 강렬한 충격 돌아본 인생이 허물어지도록 맹렬한 그리움 그렇게 나의 아내를 만났다.

review:

저의 주변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한참 지났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다. 같은 교인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말로 누구를 소개시켜 주겠다든가 아니면 선이라도 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고 지금까지 선 한번 보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반드시 교인과 결혼해야 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해서 교인으로 만든 후에 결혼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 사람의 대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탁자 위에 앉아서 땅바닥에 있는 사람을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바닥에 앉은 사람이 탁자 위에 앉은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은 쉬워도 위에 있는 사람이 밑에 있는 사람을 끌어 올리기는 훨씬 어려운 법이다. 몇 배의 힘이 드는 것은 물론이며 자칫 잘못하면 떨어지기 십상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끌어올리려 노력하다가 힘이 들면 포기하거나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천만번 변하는 것. 결혼을 비유로 든 말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결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동 방식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즉, 저의 위치가 바닥에 있느냐 탁자에 있느냐에 따라 목표의 설정과 취하는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탁자에 있을 때, 앞으로 취할 행동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라면 그 행동을 그만두는 편입니다. 이것은 좋은 쪽에 속합니다. 반대로 제가 바닥에 있는데 탁자 위의 것을 원한다면 '저것은 탁자 위에 있네. 손에 넣기 어렵겠는데'하면서 지레 포기합니다. 이것은 나쁜 쪽에 속합니다. 위의 말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저의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뭔가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기도 했습니다.

음……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설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태웅의 모습에서 벼랑끝에서 그녀를 끌어올리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겹쳐 보았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놓칠 수 없으므로 온힘을 다해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노력의 대가는 그에게 꿈처럼 달콤하고 영원히 계속될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평소에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여주인공 설하가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목도 잘 지어졌습니다. 처음의 설정(재벌의 조카, 국회의원)과 제목(여주인공이 외국인인줄 알았습니다)만 보고 엉터리 같은 할리퀸 흉내내기가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할리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작품에는 할리퀸에는 없는 인간 탐구의 깊이와 남자의 순애보가 있습니다. 아울러 '춤'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눈에 보여주는 듯한 문자적 묘사로 훌륭하게 표현해낸 작가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수작입니다.

PS: 과거의 사건에서 비롯된 여주의 기억상실과 남주의 순애보를 다룬 작품이 몇 권 있습니다. 할리퀸 로맨스 I-57번 캐슬린 오브라이언의 《사라진 기억들 (원제: Memory lapse)》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로라가 몽유병을 고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스토리인데 남주 드루의 순애보가 절절합니다.

하이틴 로맨스 85번 로빈 도널드의 《되찾은 파라다이스 (원제: The Dark abyss)》또한 기억을 잃은 아내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남편이 등장합니다.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플로라 레타 슈라이버의 《싸이빌 (원제: Sybil)》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나 (상, 하)》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었는데, 16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자가 하나의 자아로 통합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하록과 배태랑(여우, 2004)

뭘봐! 저리 안 꺼져!

벼락같이 소리친 하록 덕분에 우리 주위를 둘러싼 애들이후다닥 달아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는 쯧쯧 혀를 찼다.

좀 상냥하게 대할 순 없어? 그러니까 친구가 하나도 없지.

버릇이야.

고쳐.

내가 너더러 웃고 다니지 말라고 하면 고칠래?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난 좋은 버릇이고 넌 나쁜 버릇이잖아.

나한텐 나빠. 최악이야.

뭐가 최악이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말도 몰라?

그러니까 속에서 열불이 나도 참고 있잖아. 알았으면 자꾸 건드리지 마.

그 말을 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 딱딱해서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찬 바람이 입안으로 들어와 대화가 불가능했다.

나는 하록의 등에 뺨을 대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걸까?

Post 카타리나(영언문화사, 2002) 《불고기 그라탕》에 포함

《카타리나》의 속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