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완

비프스튜처럼....(눈과마음, 2003)

열아홉의 어느 날, 나는 엄마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라는 존재를 알았지요. 그래서일까요? 이제 나는 무엇에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제게 동의 따위를 구하지 않았어요. 늘 저보다 한발 앞서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인생을 거스르기보다는 순응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지 오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 곁으로 다가온 이 사람이 나는 두렵고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말합니다. 인생이란 제대로 익기를 기다려야 하는 스튜 요리 같은 것이라고…….

비프스튜를 끓이듯 천천히 살아가도 될까요? 부서지지 않게 모서리를 둥그스름하게 손질하며 설익은 내 인생을 기다려 준 이 남자를 믿고 그렇게 살아도 될까요?

열정(눈과마음, 2004)

“수완씨, 뭐든 내가 잘못했어. 결혼하자고 안 할게. 아무 것도 해달라는 소리 안 할게. 그냥, 그냥 친구로. 응? 가끔씩 얼굴만이라도 보면 안돼? 그럼 안돼?”

두 손을 빌듯이 하고 애원했지만 수완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미유는 간이 쪼그라든다는 심정을 이해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서 성난 사자처럼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던 수완은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You're driving me up the wall! Stop bothering me!"

미유의 마음속에서 억만 개의 똑딱단추들이 일제히 한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용없다. 다 끝났구나. 나만 몰랐지 저 사람은 이미 다 끝났구나. 빌어도 안 되는구나.

미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는 남자를, 제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남자를 미유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더는 귀찮게 안 할게. 내가 그렇게까지 지겨운지 몰랐어. 잘 있어.……귀찮게 해서 미안해.”

“미유야!”

“당신을 기억할 거야. 잘 있어.”

미유가 문을 나설 때 수완은 못 본척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산길을 홀로 내려가는 그녀의 마음은 두두둑 뜯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