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린

마스까라뜨(눈과마음, 2003)

안도감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스베따의 몸을 무릎에 앉히며 그는 가녀린 허리를 당겼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에 그녀도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차가운 여자의 코끝과 귓볼에 뜨거운 입술을 비비며 그는 그녀의 허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스베따가 신음을 흘리며 가슴에 몸을 묻어왔다. 여자의 턱을 들어 올린 그는, 작은 얼굴을 삼킬 듯 응시했다.

운명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도, 팽개칠 수도 없는 것.

그래서 운명이다.

스베따, 아니, 마리아. 그 외에 무엇이라 해도 이제는 상관없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존재만이 의미가 있을 뿐.

스페인의 자장가(눈과마음, 2003)

머리에서 떠오른 말이 조금의 여과도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도운의 눈동자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인희의 얼굴을 삼킬 듯 바라보며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나도 가끔은 이런 내 인생이 고달파 푹 쉬고 싶다고. 그럼 오늘 날 태우고 떠나는 비행기가 공중에서 펑하고 터지기라도 빌어 줘, 사랑하는 카르멘! 그럼 넌 지독하게 운이 좋은 여자가 되는 거야. 내가 죽고 나면 내 건 모두 네 것! 얼마 전 변호사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잖아? 하긴 지금도 서인희는 넘칠 만큼 운이 좋은 여자지. 내가 왜 이렇게 뼈빠지게 일을 하는지 정말 모르지는 않겠지?"

매끄러운 웃음을 끝으로 그는 양복 상의를 어깨에 걸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는 인희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그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이번에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하지만 저 무거운 문을 잠그나 그렇지 않으나 인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문을 열어 젖히면 십여 명의 경호원이 몇 초 만에 달려올 게 뻔했다.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윤도운, 정말 어디 가서 죽……어 버려!"

퓨리어스 게임(눈과마음, 2002)

화가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욱하는 무엇인가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암컷에게 날 좀 봐달라고 온몸으로 시위하는 공작새의 수컷처럼, 그에게 깃털이 있다면 서인영 앞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펼쳐 보이고 싶었다. 처음 발정기를 경험하는 어린 수컷처럼 말이다. 나를 좀 봐달라고, 장막처럼 온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머리카락을 걷고 김서형을 좀 봐달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김서형이 여기서 서인영을 보고 있다고!

젊은 나이에 머리과 감각 하나로 사업계에 뛰어들어 엄청난 부를 쌓아올린 '젊은 천재' 김서형. 그런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여자 서인영.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마자 인영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은 서형은 그녀를 되돌리기 위해 새로운 게임을 준비한다. 그의 생에 처음으로 '감정'을 담보로 한 그런 게임을. 그의 무자비한 공격에 다시 되돌아온 인영. 하지만 그녀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데……. 그리고 다가오는 결혼식에 행복을 느끼고 있던 서형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닥친다.

review:

오해로 시작된 관계가 비뚤어진 인연을 낳고 잔인한 복수로 이어집니다. 지나친 감정의 남발은 동의보다 반감을 불러오기도 하는데 남주의 감정은 격렬하고 절박하지만 독자는 거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한 걸음 뒤에서 갸우뚱합니다. 부잣집 사생아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자란 여주가 남주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욱해서 하나뿐인 인생을 담보로 게임을 시작하는 모습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남주가 감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통해 독자의 감정을 절정으로 이끈 다음 작가의 의도(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내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내가 삶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가 바로 이어져 작품의 좋은 부분이 선명히 드러나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또한 이 장면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순간적인 감정이입이 되어 남주의 감정에 동의는 하면서도 머리 한 구석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정의 수위 조절에 실패한 작품으로 약간의 완급을 두었으면 좀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PS: 오타 발견했습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라 해도, 눈앞의 이 여자는 이제 겨우 스물다이다(--> 스물다섯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누군가를 찾던 준형은 시당(--> 식당? 식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서형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